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건국 배경 === 1096년, [[카스티야 왕국|카스티야]] - [[레온 왕국|레온]] 연합왕국의 국왕 [[알폰소 6세]]는 딸 [[테레사 데 레온]]과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를 포르투갈 공동 백작으로 선임했다. 엔히크와 테레사 부부는 이베리아 반도 서북부의 작은 영지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영토와 이권을 챙기고자 노력했다. 1109년 알폰소 6세 사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공동으로 칭한 [[알폰소 1세(아라곤)|알폰소 1세]]와 [[우라카]] 부부가 서로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내전을 벌이자, 엔히크는 상황을 관전하다가 1111년 군대를 일으켜 레온으로 진군했다. 엔히크는 처음에는 우라카를 도우려 했지만, 알폰소 1세가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그 제안에 혹하여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결정 했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카스티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인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테레사가 막내아들 [[아폰수 1세]]를 포르투갈 공동 백작으로 옹립하고 백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하느님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웠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녀를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우라카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우라카의 수중에 넘어갔다. 1121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야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란호소 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두오로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하지만 우라카가 자신의 심복이었던 디에고 헬미레스를 숙청하려 했다가 디에고의 추종자들의 거센 반발을 산 덕분에, 테레사는 패망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여기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와 알폰소 7세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테레사는 레온 왕국의 가신으로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포르투갈 백작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124년 여름, 테레사는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1126년 3월 8일에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우라카의 뒤를 이어 레온 왕위에 오른 [[알폰소 7세]]가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포르투갈 백국 각지를 파괴하고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테레사는 알폰소 7세에게 항복했고, 이후로는 레온 국왕의 충실한 봉신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테레사는 갈리시아 귀족이자 트라스타마라 백작인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를 애인으로 삼고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테레사의 아들 아폰수는 자신이 성년으로 인정받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브라가 [[대주교]] 파이오 멘데스, 가정교사 에가스 모니스와 아들 로렌수 비에가스와 함께 갈리시아 귀족이 권세를 행사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포르투갈 귀족들을 규합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백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알폰소 7세는 테레사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 백국에 진입해 아폰수가 있던 기마랑이스를 포위했다. 하지만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아라곤)|알폰소 1세]]와 카스티야 일대를 놓고 심각한 정쟁을 벌이고 있던 그는 포르투갈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아폰수와 에가스 모니스 등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납부하는 대가로 기마랑이스 공략을 포기하고 귀환했다. 하지만 아폰수는 봉기를 중단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대 야고보]]의 유물이 브라가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하느님께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원하는 징표라고 주장해 귀족들을 끌여들이고 어머니에게 노골적으로 도전했다. 이에 테레사는 1128년 6월 24일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레온 왕국 장성들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가 상 마메데 전투에서 아들에게 참패했다. 이후 그녀는 두 딸 우라카, 산차와 함께 페드로 페르난데스를 따라 갈리시아로 망명했고, 1130년 11월 11일 몬테데라모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아폰수는 포르투갈 백국의 유일한 군주로 등극했다. 아폰수는 집권 직후인 1131년 포르투갈 백국의 수도를 기마랑이스에서 [[코임브라]]로 이전했다. 이곳으로 이전한 이유는 두에로 강 북쪽의 친 레온 왕국 성향 귀족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백작의 권력을 강화하고, 코임브라를 백국 남쪽의 무슬림 영토를 지속적으로 공략할 발판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산타 크루스 수도원의 설립을 후원했으며, 브라가 주교구를 레온 왕국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교구로부터 독립시켰다. 아폰수는 집권 이래로 포르투갈의 '[[프린스]]'를 칭하면서 알폰소 7세의 인정을 받고자 사절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자 않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13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시아로 진격해 어머니의 옛 연인이었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갈리시아 귀족들을 상대로 체르네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뒤 투이 등 일부 요새를 공략했다.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알폰소 7세는 어쩔 수 없이 투이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아폰수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알폰소 7세의 충실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했으며, 이번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고, 무슬림 및 기독교 통치자와의 전쟁을 치르는 황제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7세는 그를 포르투갈 백작으로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39년,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로 쳐들어왔다. 아폰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에 맞섰고, 그해 7월 25일 오우리케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군대와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초대 국왕 '''[[아폰수 1세]]'''로 즉위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